김재규 재심 시작… 여동생 “10·26이 국민 100만명 희생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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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1979년 12월 열린 공판에 출석해 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 지난 2월 서울고법 형사7부의 재심 개시 결정에 따라 16일 재심 첫 공판이 진행됐다. 서울신문 DB |
물 한 모금 삼키기 어려운 듯한 어떤 진실이 있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 그러나 그날, 1979년 10월 26일 밤, 총성은 침묵의 벽을 뚫고 민주주의의 한 줄기 빛을 비췄다. 그 중심에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있었다. 45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 사법부는 이 오래된 총성과 마주하는 법정의 문을 다시 열었다.
7월 16일, 서울고등법원은 김재규 전 부장의 재심 첫 공판기일을 열었다. 긴 세월 동안 침묵으로 묻혔던 진실의 조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의 여동생 김정숙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오빠가 막지 않았다면 국민 100만명이 희생됐을지도 모릅니다. 10·26 사건은 내란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혈육의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당시 김재규가 법정에서 남긴 최후진술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10·26의 목표는 국민의 희생을 막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있었다”고 말했다. 유신체제의 심장부를 겨눈 총성은 단순한 암살이 아니었고, 사리사욕이 깃든 권력투쟁도 아니었다. 그것은 압도적인 공포 정치 아래 놓인 민중의 숨구멍을 열기 위한 절박한 행위였다는 해석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재심 재판의 핵심 쟁점은 김재규의 행위가 과연 '내란 목적'이 있었느냐는 것이다. 그의 변호인단은 세 가지를 근거로 기존 판결을 부정하고 있다. 첫째, 1979년 선포된 비상계엄이 위헌·위법적이었다는 점. 둘째, 김재규의 행위는 계획된 쿠데타가 아니라 박정희 정권의 종식과 국민의 피해를 막기 위한 결단이었다는 점. 셋째, 내란 목적을 입증할 직접적 증거가 없다는 점이다.
이 재판은 단지 한 개인의 명예 회복을 위한 법정 다툼이 아니다. 이것은 사법부가 스스로의 과거를 돌아보고, 역사의 물줄기를 정직하게 다시 쓰려는 시도다. 김정숙 씨는 말한다. “1980년 당시 재판은 사법의 치욕이었습니다. 통치 권력 앞에 고개 숙인 사법부는 정의의 최후 보루가 아니었습니다.” 이 고백은 오랜 세월 뿌리내린 사법 불신의 기원을 되짚는 고통스러운 고해성사다.
김재규는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한 직후 체포되어 불과 6개월 만에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됐다. 그의 재판은 군부의 장악 아래 '정치적 사법'으로 진행되었고, 그 속도는 마치 무엇인가를 서둘러 덮기 위한 조급함처럼 보였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 중심으로 기록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패자의 목소리도 다시 들려야 한다. 김재규의 재심은 바로 그 ‘지연된 정의’를 향한 첫 걸음이다. 오늘 법정에서 다시 시작된 이 재판은, ‘그날의 총성’을 다시 해석하고자 하는 우리의 시대적 소명이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과연 그 밤의 총성은 폭력인가, 희생인가? 권력 찬탈인가, 시대적 결단인가?
역사의 진실은 단순한 법리로만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의 법정이 보여준 용기는, 더 이상 ‘침묵의 정의’로 남겨둘 수 없다는 우리 사회의 각성을 증명하고 있다. 김재규의 재심이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새로운 길목에서 다시 묻는 질문이다.
“정의는,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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